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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울타리

내 삶의 모든 부분을 채운 엄마의 사랑

2020.07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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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엄마는 어부의 아내였다. 내가 예닐곱 살쯤 되던 해에 우리 가정이 섬에서 뭍으로 이사를 나온 뒤에는 가축농장과 공장을 옮겨 다니며 일하셨다. 시부모님 봉양에, 어린 삼 남매를 키우며 아빠 일까지 도와야 했던 엄마는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내 어릴 적 기억 속에 엄마가 항상 부재중이던 이유였다.

    유치원에서 돌아와 먹었던 계란볶음밥은 할머니의 솜씨였고, 소풍과 운동회 때 찍은 사진에도 엄마는 없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서는 아빠가 엄마의 자리를 대신했다. 크고 작은 교내행사에 참석하며 나를 챙겼던 분은 아빠였다.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나는 아빠를 무척 따랐다. 존경하는 분이 누구냐고 물으면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이 아빠라고 대답할 정도였다.

    엄마에게 왜 자식들 커가는 모습도 못 볼 만큼 바빴느냐며 서운함을 토로한 적이 있다. 나도 엄마가 된 지금 돌이켜보면, 철없는 딸의 말에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 후회스럽기만 하다.

    사실 엄마는 우리 곁에서 단 한 순간도 떨어지지 않으셨다. 소풍이나 운동회가 있는 날이면 엄마는 이른 새벽에 일어나 고슬고슬하게 밥을 지어 김밥을 싸주셨다. 엄마 옆에서 졸린 눈을 비비며 먹었던 김밥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엄마가 일을 쉬는 날이면 둥그런 밥상에 밀가루를 뿌리고 엄마랑 언니랑 칼국수도 만들고, 재미난 모양의 도넛도 만들었다. 수두에 걸려 온몸에 붉은 발진이 났을 때 아침저녁으로 꼼꼼하게 약을 발라주고 밤새워 간호해주신 분도 엄마였다. 드러내지 않아서 깨닫지 못하고 있었을 뿐, 유년에서 성인이 된 지금까지 내 삶의 모든 부분을 가득 채운 것은 엄마의 지극한 사랑이었다. 당신의 수고로 자란 자녀가 고마워할 줄 모르고 불평해도 책망하지 않으셨던 엄마께 뒤늦은 용서를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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