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그렇다고 해도 우리 엄마는 아닌 줄 알았습니다. 육 남매 중에 넷째로 태어난 저는 형제가 많은 까닭에, 부모님의 관심을 기대만큼은 받지 못하고 자랐습니다. 그 탓에 작은 일에도 크게 서운해했고, 항상 ‘엄마가 나를 미워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종갓집 맏며느리인 엄마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바빴습니다. 공무원인 아버지가 보름에 한 번 집에 오셨기에 여섯 아이 먹이고 입히랴, 농사지으랴, 시동생들 건사하랴, 집안 대소사 돌보랴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한 형편이었습니다.
그래도 엄마는 사방에 고요가 내려앉은 밤이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저희 옷을 만들기 위해 재봉틀을 돌렸습니다. 헌 옷에 다른 천이나 레이스를 덧대면 그 나름대로 입을 만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그게 너무 싫었습니다. 제 눈에는 천을 댄 옷이 예쁘지도 않았고, 새 옷을 입고 싶은 마음도 몰라주는 엄마가 밉기만 했습니다. 엄마의 수고는 모른채 그저 ‘엄마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미워한다’고 오해하면서 서러움을 삭였지요. 재봉틀 소리는 매일 바쁜 엄마가 곁에 있다는 안도감을 주기도 했지만, 요란하게 울리며 단잠을 깨우고 제 속을 긁기도 했습니다.
나이 오십이 넘을 때까지 미묘하게 남아 있던, 엄마를 향한 오해와 섭섭함이 ‘우리 어머니’ 글과 사진전에서 비로소 한 톨도 남김없이 다 사라졌습니다. 어머니전에는 어느 어머니의 손을 촬영한 사진 작품이 있었습니다. 틀어지고 거칠어진 사진 속의 손을 보면서 엄마가 떠올랐습니다. 관절염 때문에 마비된 엄마의 손이 딱 그랬거든요. 엄마 손이 그리된 것을 어찌 세월 탓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자식 하나 키우기도 쉽지 않았는데 그 어렵던 시절 여섯 남매 키우느라 엄마는 얼마나 치열하고 힘들었을지 감히 헤아릴 수 없습니다. 밤마다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왜 몰랐을까요. 밤이 늦어도, 몸이 녹초가 되도록 끝나지 않는 고생, 쉬지 않고 귓전을 울리는 재봉틀 소리가 자식들 예쁘게 입히려는 엄마만의 사랑 표현이었다는 것을요.
이후로는 뒤늦게나마 엄마를 이해하고 저 나름대로 감사를 표현하며 살고 있습니다. 엄마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으며 “그때 진짜 힘들었겠네” 공감하기도 하고요. 한번은 엄마가 김치를 담가주셔서 “진짜 맛있다”고 하니까 “살면서 너한테 칭찬 처음 듣는다”며 깜짝 놀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랜 세월 엄마가 저에게 정이 없다고 오해했는데 실은 제가 엄마에게 참 매정하고 박했나 봅니다. 이제는 그러지 말아야지요. 엄마가 저를 사랑한 만큼 저도 엄마를 사랑하는 딸이 되고 싶습니다.
전주에서 어머니전이 다시 열렸을 때, 엄마에게서 물려받은 재봉틀을 전시회 소품으로 내놓았습니다. 누군가 예전의 저처럼 엄마의 진심을 모르거나 오해하고 있다면, 혹은 그 가없는 사랑을 잊은 채 쓸쓸히 살고 있다면 ‘아, 그게 사랑이었구나. 우리 엄마가 나를 정말 아끼셨구나’ 깨닫고 가슴 따뜻한 감동을 얻길 바라면서요. 얼마 전 100만 명 관람을 돌파한 어머니전이 언제까지나 많은 이들에게 어머니 사랑을 일깨워주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