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한국을 찾은 제83차 해외성도 방문단 중에는 특별한 손님들이 있었습니다. 몽골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있는 시지르마, 시네초그게니 남매입니다. 이들은 ‘진심, 아버지를 읽다’전과 ‘우리 어머니’ 글과 사진전을 관람하며 가슴 깊이 묻어두었던 부모님의 사랑과 희생을 떠올려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자녀들이 무대 위 화려한 예술가의 길을 걷기까지 그 뒤에서 묵묵히 힘이 되어준 부모님의 사랑을 만나봅니다.
#1 시지르마
동생과 함께 한국에 와서 모든 순간이 감사하고 행복했지만 특별히 깊은 울림을 받은 일정이 있었습니다. 아버지전과 어머니전 관람이었습니다. 전시회를 많이 다녀봤는데도 그토록 가슴을 파고드는 전시는 처음이었습니다. 자녀를 위해서라면 부모님이 어디까지 헌신할 수 있는지 다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부모님께 넘치도록 사랑을 받은 저로서는 전시 글 한 편 한 편이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예술계에 몸담은 아버지와 어머니는 우리 삼 남매를 남부럽지 않게 키우셨습니다. 그러나 사회가 격변하던 1990년대에 이르러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혼란한 세상 분위기에서도 아이들을 잘 가르치겠다는 일념으로, 부모님은 안정적인 직업과 환경을 뒤로하고 아무 연고 없는 울란바타르로 이사를 결정했습니다. 어린 제 눈에도 온 가족을 이끌고 낯선 도시로 거처를 옮기는 일은 쉽지 않아 보였습니다.
역시나, 온갖 어려움이 우리 가족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당장 몸을 누일 집부터 문제였습니다. 울란바타르로 와서 이사를 열두 번이나 할 정도였으니까요. 돈이 없어서 주인에게 쫓겨나기도 하고, 부모님의 일자리를 찾기 위해 거주지를 옮겨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끼니를 거르고 길 위를 전전하면서야 배불리 먹을 때는 몰랐던 부모님의 고단한 삶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한 번은 도시 외곽에 집을 구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부모님의 일터는 한국의 광화문광장 같은 수흐바타르 광장 근처였는데, 집까지는 걸어서 꼬박 세 시간이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자정 무렵 일을 마친 부모님은 늘 지친 몸을 이끌고 밤길을 걸어오셨습니다. 몽골에는 운전자가 방향이 같은 행인을 태워주고 약간의 사례비를 받는 문화가 있습니다. 언젠가 퇴근길에 한 운전자가 부모님에게 차에 타라고 권하더니 어떤 요구도 없이 조용히 집까지 태워줬다고 합니다. 부모님은 그날의 일을 지금까지도 이야기하십니다. 그만큼 어렵고 팍팍한 삶 속에서 누군가의 대가 없는 배려가 부모님에게 큰 위로가 된 것이겠지요.
부모님의 묵묵한 수고 덕분에 저와 동생은 학비 걱정 없이 수업에 집중하며 예술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저는 큰 극단에 들어가 12년간 무용수이자 가수로 무대를 누볐습니다. 몽골 전통문화를 지키고 널리 알린 공로로 여러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한국에서 두 전시를 관람하며, 제가 지금까지 일궈온 모든 일이 전부 부모님의 희생 덕분이라는 것을 새삼 느꼈습니다. 부모님들은 오직 자녀만을 위해 살아갑니다. 그 조건 없는 희생과 사랑이 우리의 삶을 더 가치 있고 소중하게 만듭니다.
하늘 아버지 어머니께서도 하늘의 모든 영광을 뒤로하시고 이 땅에 오셔서 자녀들만을 위한 삶을 살아가셨습니다. 이 사실을 잊고 본질 없는 것에 마음을 빼앗길 때도 있지만 영혼의 생명이 하늘 아버지 어머니께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하루하루를 허투루 살 수 없습니다. 하늘 부모님께 받은 가없는 사랑을 힘 다해 전하는 자녀가 되겠습니다.
#2 시네초그게니
예술가였던 부모님은 자녀들도 같은 길을 걷길 바라셨습니다. 부모님은 저희가 오직 예술에만 전념하고, 좋은 연주와 음악을 많이 접하며 배울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주셨습니다. 저도 일곱 살 무렵 시작한 바이올린을 거쳐 몽골 전통악기인 마두금을 연주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모두가 다음 끼니를 걱정할 만큼 어려웠던 시기라 돈이 많이 드는 예술을 가르치려는 집이 없었으니까요. 부모님은 당신들의 삶을 기꺼이 희생해 우리의 미래를 열어주셨습니다. 고달프고 힘들었을 텐데도 제 기억 속 부모님은 단 한 번도 미소를 잃지 않으셨습니다.
부모님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예술대학 입시를 준비했습니다. 당시 입시는 전체 지원자 중 다섯 명가량이 남을 때까지 계속해서 시험을 치르는 방식이었습니다. 복잡한 리듬을 기억해 따라 하고, 여러 음정을 한 번에 맞히는 등의 여러 실기 시험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부모님의 뒷바라지가 없었다면 극한의 압박을 이겨내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저 때문에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생각하며 사력을 다한 끝에 최종 합격자 명단에 제 이름을 당당히 올렸습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대학에 합격한 후에도 연습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매일 10시간씩 손이 부르트도록 악기를 연주했습니다. 게으름을 부리고 싶다가도 부모님의 희생과 노고를 떠올리면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반드시 예술가로 성공해서 부모님께 보답하겠다’는 간절함이 지금의 제가 무형문화재가 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습니다.
한국에서 관람한 아버지전 소품 중에는 어느 아버지가 자녀에게 선물한 턴테이블과 레코드판이 있었습니다. 음악에 조예가 깊은 아버지가 자신을 따라 음악을 좋아하게 된 딸에게 “음악을 들으려면 제대로 들어야 한다”며 선물한 것이라고 합니다. 부모님의 지원으로 좋은 음악을 편안히 감상했던 저의 지난 시절이 겹쳐 보여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자녀에게 좋은 것만 들려주고, 좋은 것만 주고 싶은 마음은 어느 부모님이나 똑같은 것 같습니다.
한국에 공연하러 열 번 넘게 왔지만 이번 방문이 더 기억에 남는 이유는 영육 간에 부모님 사랑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부모님과 하늘 부모님께서 자랑스러워하시는 예술가가 되고 싶습니다. 거친 풍파를 온몸으로 막아주고 저에게는 좋은 것만 누리게 해주신 부모님의 사랑에 보답하는 유일한 길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