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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집으로 돌아가는 길

2025.1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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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따뜻한 햇살에 가을 아침의 쌀쌀함이 물러가기 시작할 즈음, 약속이나 한 듯 동네 아이들이 은행나무 아래로 모였다. 동네 아이들이라고 해봐야 종구 형을 따라 나온 1학년짜리 꼬마 종아를 포함하여 정혁이 형과 나까지 고작 네 명이 전부였다. 종구 형과 정혁이 형은 6학년, 나는 5학년이었다. 늘 함께 놀던 4학년 흥섭이가 보이지 않아 흥섭이네를 흘끗거렸지만 싸늘한 기운만 감돌았다. 얼마 전 흥섭이네는 서울로 이사를 갔다.

    “우리 산에 가서 놀자!”

    시시콜콜 장난을 치다 마땅한 놀잇감이 없어 조금 무료해지던 차에 누군가 소리쳤다.

    “좋아!”

    우리는 자못 들뜬 표정으로 맞장구를 쳤다.

    “종구 형, 근데 종아는 어떡하고?”

    모두 종아를 쳐다봤다. 올여름 뙤약볕에 그을려 까무잡잡해진 종아가 서 있었다.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헝아, 나도 갈래.”

    꼬마 종아가 간절한 눈빛으로 종구 형의 팔을 잡고 매달렸다.



    #2

    우리는 종아를 가운데 세우고 줄지어 동네 뒷산으로 향했다. 봄이면 편을 나누어 전쟁놀이를 하고 겨울이면 비료포대로 눈썰매를 타고 노는 곳이었다. 우리는 금방 산 중턱에 이르렀다. 하지만 머루, 다래, 개암열매도 없는 늦가을. 산에서도 놀거리를 찾을 수 없었다.

    “우리 산꼭대기에 가볼까?”

    뒷산은 명봉산의 한 줄기였다. 언젠가 동네 형들로부터 뒷산 능선을 따라 계속 올라가면 명봉산 정상이 나온다는 말을 들었다. 누구는 정상에서 가까이 날아가는 전투기를 보며 고막이 터질 것 같았다고 했고, 문막이 내려다보인다고도 했다. 겨울방학에 외갓집을 갈 때마다 버스를 타고 지나던 문막이 명봉산 너머에 있다니, 더욱 호기심이 생겼다.

    “그래, 가보자!”

    우리는 줄지어 오솔길을 따라 산을 올랐다. 마을은 곧 시야에서 사라졌고 숲이 더욱 우거진 낯선 산길로 접어들었다. 이따금씩 산새 소리만 들려오는 고요한 산속 오솔길. 우리가 웃는 소리에 놀랐는지 산새가 푸드득 날아올라 오히려 우리를 놀라게 했고, 동네 어른들이 토끼나 너구리 같은 산짐승을 잡으려고 파놓은 함정과 올무가 호기심을 자극했다.

    산이 깊어질수록 적막감이 더해졌다. 혹여 호랑이라도 나타날 것 같은 불안감에 등골이 오싹하기도 했지만 계속 떠들며 정상을 향해 나아갔다. 꼬마 종아는 슬리퍼를 신고서 잘도 따라왔다.



    #3

    두어 시간쯤 지나 명봉산 정상에 닿았다. 성취감에 흥분하여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야호’를 외쳐댔지만 기대했던 전투기는 보이지 않았다. 저 멀리 산 아래로 문막인 듯한 마을과 여기저기 논밭이 보이기는 했다.

    “어! 저기 연못이 있어!”

    정혁이 형이 소리쳤다. 형이 가리키는 곳을 가만히 보니 논밭 사이에 손바닥만 한 물웅덩이 하나가 있었다.

    “저기 붕어 많겠다.”

    “가볼까?”

    눈빛을 주고받은 뒤 곧바로 산비탈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마을에서 능선을 따라 완만하게 올라왔던 것과 달리 무릎까지 쌓인 낙엽 위로 껑충껑충 몸을 던지며 마치 다람쥐처럼 산비탈을 타고 내달렸다. 형들 못지않게 산비탈을 타는 종아 뒤를 종구 형이 따랐다.

    순식간에 산을 내려와 곧 연못 앞에 다다랐다. 연못은 생각보다 큰 저수지였는데 둑이 높고 가팔라서 가까이 갈 수 없었다. 조금 떨어져 내려다본 저수지는 그저 시커먼 물일 뿐이었다. 붕어는 보이지 않았다. 기대했던 것과 다른 저수지의 모습에 실망해 심심풀이로 돌멩이를 저수지에 던지며 잠시 시간을 보냈다.



    #4

    “배고프다.”

    세 시간여의 산행에 점심시간을 훌쩍 넘기니 허기와 피로가 느껴졌다. 꼬마 종아가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로 서로를 바라봤다. 그리고 뒤돌아 산을 올려다봤다. 우리 동네에서 바라본 뒷산과 달리 문막에서 바라본 명봉산은 가파르게 솟은 높은 산이었다. 지치고 배고픈 내게 명봉산은 더욱 높아 보였다. 형들도 도저히 넘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 원주로 가자!”

    내가 말했다. 모두 나를 쳐다봤다.

    “여기서 원주 그렇게 멀지 않아. 이모가 원주에 사는데 가서 차비 얻어서 버스 타고 집에 가자!”

    명봉산 넘기를 포기한 종구 형과 정혁이 형은 별말 없이 나를 따랐다. 사실 내게 문막에 대한 기억은 여주에 있는 외갓집에 가기 위해 원주에서 버스를 타고 지나갔던 것이 전부였다. 원주까지 걸어서 얼마나 걸릴지 몰랐다. 다만 버스 길을 따라가면 원주가 나오리라는 확신과 원주고등학교 근처에 이모네 집이 있다는 기억뿐이었다.

    우리는 ‘원주’라고 적힌 이정표를 보고 버스가 지나간 비포장도로를 따라 걸었다. 하지만 경적을 울리며 빠르게 지나다니는 자동차의 위협과 바퀴에서 일어나는 먼지를 견디기가 어려웠다. 원주로 가는 방향만 기억한 채 다시 마을로 내려가 농로를 따라 걸었다.



    #5

    찻길로부터 멀어지자 곧 방향을 잃어버렸다.

    “아저씨, 원주 가려면 어디로 가야 돼요?”

    저만치 밭에서 일하는 한 아저씨에게 정혁이 형이 큰 소리로 물었다. 아저씨는 우리가 걷고 있는 길의 방향을 손으로 가리키며 길을 알려주었다.

    다시 부지런히 길을 걸었다. 더 이상 노닥거릴 기분이 아니어서 서로 멀찍이 떨어졌다. 원주로 가자는 말을 꺼낸 내가 맨 앞에서 걸었고, 종구 형이 칭얼대는 꼬마 종아를 데리고 제일 뒤에서 따라왔다.

    모두 지쳐갔다. 몇 시간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걷고 있었다. 얼마나 더 가야 할지 알 수 없었지만 돌아갈 엄두도 못 낼 만큼 너무 멀리 와 있었다.

    마을을 지나 작은 언덕을 넘으니 길을 가로지르는 작은 도랑이 보였다. 나는 잠시 멈춰서 뒤에 오는 형들을 기다렸다.

    “형아, 목말라.”

    꼬마 종아가 쓰러질 듯 주저앉았다. 나는 도랑물을 살폈다. 물이 아주 깨끗해 보였다. 손으로 만져보니 차가웠다. 내가 먼저 엎드려 도랑물에 입을 대고 후루룩 들이켜자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도랑물을 마셨다. 조금 기운이 나는 듯했다.

    “빨리 가자!”

    조급한 마음에 나는 발걸음을 재촉하며 앞장섰다.

    “잠깐만. 종아가 잠들었어!”

    물을 마시고 잠깐 쉬는 사이, 지쳐버린 종아가 길바닥에 누워 잠이 들었다. 흐느적거리는 종아를 억지로 일으켜 세우고 손을 잡아끌자 종아가 울먹이며 겨우 발걸음을 떼었다.



    #6

    나지막한 언덕을 넘자 몇몇 농가가 모여 있는 작은 마을이 나왔다. 어느 농가 앞을 지나다 한 아저씨를 만났다.

    “아저씨, 여기서 원주까지 어떻게 가요?”

    “걸어서 얼마나 걸려요?”

    “뭐? 지금 걸어서 원주를 간다고? 너희들 오늘 걸어서 원주 못 가!”

    “우리 오늘 원주에 가야 돼요.”

    “거기가 어디라고! 차라리 여기서 자고 내일 가라!”

    우리는 서로 눈짓하며 조금씩 발걸음을 옮겼다.

    “형, 가, 가자!”

    걸어서는 오늘 안에 원주에 못 간다는 말보다 자고 가라는 말에 덜컥 겁이 나 슬금슬금 아저씨에게서 멀어졌다. 그리고 등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걷다가 걸음아 날 살려라 뛰었다. 뒤에서 아저씨가 한 번 더 소리쳤다.

    “얘들아! 자고 가!”

    다행히 아저씨는 따라오지 않았다. 친절한 분이었을 수도 있지만 그땐 이상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숨을 헐떡이며 잠시 뒤를 돌아보다가 다시 걸었다. 어느덧 해가 산에 걸릴 듯 기울었다.



    #7

    서서히 땅거미가 내려왔다. 건드리면 눈물이 터질 만큼 마음이 초조해졌고 몸은 녹초가 되어갔다. 한 아주머니를 만나 여기가 어디인지 물었다.

    “여기 동돌미인데…. 너희 어디 가니?”

    “동돌미요? 나 여기 어딘지 알아!”

    옆에 있던 정혁이 형이 갑자기 흥분한 목소리로 알은체를 했다. 모두 놀란 눈으로 형을 쳐다봤다.

    “여기서 우리 동네 멀지 않아. 이쪽으로 계속 가면 우리 동네 나와!”



    #8

    이제 정혁이 형이 앞장서 걸었다. 우리는 개울가 논두렁길을 따라 형의 뒤를 쫓았다. 마음은 여전히 불안했지만 머지않아 우리 동네가 나온다는 희망에 활기를 되찾았다. 땅거미는 더욱 짙어졌다.

    저만치 빠른 걸음으로 앞서는 형을 따라 한참을 걷다 보니 어디선가 본 듯한 그림이 펼쳐졌다. 이내 우리가 이른 곳이 어디인지 확실해졌다. 아버지가 소를 앞세우고 써레질을 하던 곳, 써레질 후엔 내가 소에게 풀을 뜯기던 곳, 엄마가 새참을 머리에 이고 오던 곳, 얼마 전에 동네 어른들이 함께 벼를 타작했던 바로 그곳이었다.

    “혀어엉!”

    왜 부르는지 알겠다는 듯 정혁이 형이 뒤를 돌아보며 이를 드러내고 활짝 웃었다. 까무잡잡한 피부 탓에 하얀 이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나는 뒤를 돌아 뒤처져 따라오는 종구 형과 종아를 향해 소리쳤다. 종구 형도 알았다는 듯 소리쳐 화답했다. 저마다 기쁨에 찬 괴성과 환호성을 질러댔다.

    그때 정혁이 형이 갑자기 논 위쪽에 있는 밭으로 뛰어 올라갔다. 밭에서 무언가를 뒤적이며 찾더니 곧 뭔가를 입에 넣었다.

    “형! 그거 뭐야?”

    “무야.”

    정혁이 형이 무를 한입 가득 씹으며 대답했다. 그곳은 무밭이었다. 아직 수확되지 않은 무들이 어스름 속에서 여기저기 하얀 밑동을 드러냈다.

    “이거 먹어도 돼?”

    “여기 우리 밭이야. 빨리 먹어.”

    우리는 무를 하나씩 뽑아 들고 입으로 껍질을 퉤퉤 벗겨내면서 허겁지겁 배를 채웠다. 어기적어기적 무를 씹어 먹으며 허기와 갈증을 채우고 다시 노닥거리며 집으로 향했다.



    #9

    아랫마을 집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집집마다 하얀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아랫마을을 지나 산자락을 감아 도니 논두렁길 위로 우뚝 솟은 은행나무가 보였다. 우리 동네였다. 동네 어귀에 다다르자 종아가 작별 인사도 없이 요란한 슬리퍼 소리를 내며 먼저 집으로 뛰어갔다. 종구 형, 정혁이 형과 나는 안도의 웃음을 나누며 각자 집으로 향했다.

    은행나무 아래를 지나 집 바깥마당에 들어섰다. 꿀꿀 쩝쩝 요란하게 죽을 먹는 돼지, 안마당 가마솥에서 풍겨오는 쇠죽 내음, 가마솥 뚜껑 여닫는 소리, 허기를 참지 못해 아버지를 보채는 소 울음소리…. 온종일 낯설고 두려운 곳을 헤매다 해가 지고 나서야 겨우 돌아온 우리 집이었다. 쇠죽 내음이 어찌 그리 구수하고 좋은지! 돼지우리 두엄 냄새마저도 향기로운 듯했다.

    울타리를 지나 안마당에 들어서니 김을 뿜어내는 가마솥 아래 웅크리고 앉은 아버지의 뒷모습이 아궁이 불빛에 너울거렸다. 나도 모르게 히죽 웃음이 나왔다. 인기척에 아버지가 돌아봤다.

    “이 녀석, 지금이 몇 신데 이제야 들어와! 숙제는 다 했어?”

    “금방 할게요.”

    쭈뼛쭈뼛 마당을 지나 봉당에 올라 부엌을 빼꼼 들여다봤다. 어머니가 아궁이에 불을 지펴놓고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나를 돌아보고는 웃으며 한마디 했다.

    “아침에 나간 녀석이 점심도 안 먹고 어디서 놀다가 이제야 들어와? 배 안 고파?”

    “무 먹었더니 배불러.”

    “아이고, 무로 배를 채웠어?”

    “히히히… 근데 엄마, 동돌미가 어딘 줄 알아?”

    “저어기 승안동 돼니께 아녀? 근데 네가 동돌미를 어떻게 알어?”

    “아니, 그냥 정혁이 형이 가봤다기에….”

    차마 동돌미에 다녀왔다고 말할 수 없었다. 혼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안방으로 들어가 아랫목 담요에 손발을 넣고 앉았다. 구들장이 데워져 따끈따끈했다. 긴장이 풀리고 다리가 뻐근했다. 뜨끈한 방바닥에 등을 대고 누웠다. 또다시 웃음이 피식피식 새어 나왔다. 마치 꿈을 꾸는 듯했다.



    #10

    “아이고, 뭘 하고 놀았기에 지쳐서 그새 잠이 들었어? 저녁 먹게 어서 일어나.”

    몽롱한 상태로 밥상머리에 앉았다. 내가 좋아하는 검은콩밥과 된장국에서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나도 모르게 또 웃음이 나왔다.

    “무슨 좋은 일이 있어서 아까부터 자꾸 히죽히죽 웃어?”

    “히히히. 그냥.”

    이유를 말할 수 없었다. 그냥 웃을 수밖에.

    “숙제는 다 했어? 밥 먹고 알파벳 다 외웠나 볼 거여!”

    “아… 한 시간만 있다가요.”

    아! 꿈이 아니라 현실이구나! 하지만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따뜻한 밥상을 마주하고 있으니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새삼 부모님과 함께하는 집이 얼마나 포근하고 좋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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