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잠에 드는 순간까지 하는 고민입니다. 가족들과 매주 예배를 드리러 가고, 틈날 때마다 주변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하려 하지요. 마음과 달리 성경 말씀이 두서없이 나올 때가 많지만 그래서 더 간절해지는 듯합니다. 제 입에서 ‘하나님’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다니, 이전의 저를 아는 사람이라면 깜짝 놀랄 일입니다.
어린 시절, 절에 다니는 부모님의 영향으로 저도 불교 신자라 생각하며 자랐습니다. 천주교 집안인 남편을 만나면서는 천주교회에 가기 시작했습니다. 열심히 다녀보려고 교리반까지 들어갔지만 성경이 아니라 교리서를 보며 외울 뿐이더군요. 어디든 몸담으면 제대로 알고 이해해야 하는 성격인 저와는 안 맞는다는 생각에 발길을 끊고 다시 엄마를 따라 절에 다녔습니다. 저 자신만 믿고 살아가기에 세상은 불확실한 일로 가득했으니까요. 불교대학에 가서 경전을 달달 외우기도 하고 시간이 날 때마다 방방곡곡 절이라는 절은 모두 돌아다니며 가족의 건강과 번영을 빌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자녀들의 결혼 날짜나 이사 날 등 작은 일 하나라도 무속인을 찾아가 물어보고 결정했습니다.
손녀가 아프다는 걸 알게 된 후로는 그런 경향이 배로 심해졌습니다. 손녀와 딸만 생각하면 견디기 힘들 정도로 마음이 아픈 탓에, 당시 운영하던 미용실에 온 손님들이 ‘여기 가서 기도해 봐라’, ‘저기서 누가 병이 나았다더라’ 하고 알려주면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이곳저곳을 헤맸습니다. 조상 신을 잘 공경하면 된다는 누군가의 말에 혹해 시간과 돈을 허비하기도 했는데 상황이 나아지기는커녕 스트레스로 제 몸만 망가졌습니다. 이 길이 정답이 아니라는 걸 머리로는 알았지만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기에 그저 뭐라도 하려 했습니다. 그 세월이 자그마치 30년이었습니다.
어디서도 개운함이나 안도감을 느끼지 못하고 마음 수양이나 하며 여생을 보내려던 차, 시누이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천주교였던 시누이가 아주 오래전 종교를 바꿨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 소문을 전해주던 친척들은 그곳이 어딘지 정확히는 몰라도 따라가지 말라고 하나같이 덧붙였기에 그런가 보다 했습니다. 그런데 시누이가 성경 말씀을 들어보라는 것이 아닌가요. 그간 이런저런 종교를 권유받았어도 성경을 알아보라는 사람은 없던 터라 그 말이 무척 반가웠습니다. 겉으로는 종교는 안 바꾼다는 으름장을 놓고 영상 통화로 시누이의 발표를 들었습니다.
첫 발표는 어머니 하나님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아버지가 계신다면 어머니도 계시듯 아버지 하나님이 계신다면 어머니 하나님도 계신다는 건데, 당연한 이치인데도 처음 들어서인지 선뜻 수긍하기 어려웠습니다. 양쪽 이야기를 들어봐야 한다는 생각으로 반대 의견을 찾아서 반박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저처럼 천주교를 다녔던 시누이가, 저와 달리 이제는 성경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게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했습니다. 뭔가 이유가 있겠다 싶어 시누이와 제대로 성경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시누이가 알려주는 말씀은 모두 성경에 있었고, 앞뒤 모순이 없었습니다. 어디서도 알려주지 않았던 우리 영혼의 시작과 끝, 장차 돌아갈 하늘 본향에 관해 듣고 막연하던 삶이 뚜렷해졌습니다. 분명 성경 각 권을 기록한 시기는 저마다 다른데 전혀 공백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구절구절이 어제 적은 듯 생생하게 서로를 뒷받침하며 오늘을 사는 제게 무엇이 진리인지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말씀이 살아서 펄떡펄떡 뛰는 것 같다고나 할까요. 올바른 길로 찾아가는 방법을 하나하나 알려주신 안상홍님이 참 하나님이시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마침내 제 영혼의 아버지 어머니와 만났다는 가슴 벅찬 기쁨 속에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습니다.
이후로는 말씀도 더 귀에 쏙쏙 들어왔습니다. 그동안 답을 얻겠다고 찾아간 모든 곳에서 ‘1+1’의 답이 5가 됐다가 100이 됐다가 하는 식의 주장만 접하다가 정확히 ‘1+1=2’라고 말하는 하나님의 교회 진리에 매번 감탄했습니다. 왜 이제야 진리를 알게 되었는지 안타까우면서도, 5년이나 10년 후가 아닌 지금이라도 하나님 품에 돌아와 감사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은 나처럼 시간을 허비하지 않길 바라며, 함께 사는 딸에게 가장 먼저 구원의 소식을 전했습니다. 제가 그토록 진리를 찾아다닌 이유 중에는 딸이 참 하나님의 보호 아래 행복하게 살길 바라는 마음도 컸기 때문입니다. 확실한 진리인 만큼 딸도 잘 받아들일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 제가 그랬듯 딸도 몇 십 년간 시누이가 다니는 교회에 대한 억측과 오해를 들어온 터였습니다. 시누이와 함께 딸의 마음이 열리길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엄마가 왜 이렇게 간절히 권하는지 들어는 봐야 하지 않겠냐고 설득한 끝에 딸이 말씀을 살피기로 했습니다. 소식을 들은 시온 식구들의 연합 기도가 더해져 기적이 이뤄졌습니다. 제가 침례 받은 지 3개월 뒤에 딸도 진리를 인정하고 손주들과 함께 죄 사함의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3일 후에는 친정 엄마도 구원으로 인도되었습니다.
이후 저희 집의 풍경이 달라졌습니다. 아침 식사를 마치면 식탁에 모여 영상 설교를 듣고 기도를 드립니다. 시온에서 예배를 드리고 오면 딸의 눈은 웃고 있고 입에서는 감사가 흘러넘칩니다. 설교 말씀이 꼭 자신에게 주시는 말씀 같다며 시온의 향기를 이어갑니다. 아픈 자녀를 돌보는 딸의 근심을 덜어주고 싶어 그간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지만 딸을 웃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제 딸의 미소를 항상 본다는 것 자체만으로 하루하루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 행복을 저만 누린다면 욕심이겠지요. 형제 중 제일 애틋한 막냇동생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역시 수십 년간 쌓인 오해를 금방 풀기는 어려웠습니다. 얼음장 같은 동생의 반응이 내심 서운해서 다른 이들에게 먼저 말씀을 전했습니다. 사위, 미용실 단골손님, 오랜 지인들이 하나님 품으로 나아오는 중에도 동생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기도할 때면 가장 먼저 동생의 이름을 읊조렸습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동생에게 “우리는 이제 낭비할 시간도 없으니, 직접 들어보고 아니다 싶으면 동생인 네가 나를 올바른 곳으로 구해내라” 하며 말씀 들어볼 것을 재차 권했습니다. 동생은 드디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올해 유월절 전도축제 기간, 하루도 빠짐없이 동생에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얼어붙었던 마음이 생명수에 적셔지면서 동생이 조금씩 귀를 기울이는 게 느껴졌습니다. 놓치는 내용이 있으면 다시 설명해 달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목이 쉬도록 진리 말씀을 가르쳐주고 5월부터는 교회 관련 영상들을 보내주었습니다. 성경은 단순한 책이 아니라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우리 아버지 어머니의 이야기임을, 잃은 자녀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간절한 외침이 담겨 있는 편지임을 알렸습니다.
6월에는 교회에 초대해 말씀을 진지하게 살폈습니다. 동생은 모든 내용을 잘 이해했지만 침례는 거절했습니다. 하려면 제대로, 열심히 해야 하는데 침례만 받고 예전처럼 사는 것은 양심에 걸린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하지만 한 치 앞도 장담할 수 없는 우리가 하나님을 영접하기에 완벽한 때를 찾기란 어렵지 않을까요. 하나님의 나라에 입성하려면 먼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고 하자 마음이 움직인 동생은 이내 시온 가족이 되었습니다.
돌고 돌아 아버지 어머니 품으로 돌아오기까지 참 오래도 걸렸습니다. 만약 긴 세월 가족들의 냉대와 외면에 지친 시누이가 제게 성경 말씀을 전해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해 봅니다. 여전히 불확실한 현실에서 방황하고 있으리라 생각하니 정말 아찔합니다. 제가 헤매던 30년간 시누이는 혼자 믿음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참 외로웠을 텐데 그럼에도 구원의 소식 알리는 사명을 포기하지 않아주어 정말 고맙습니다. 그 간절함 덕에 저뿐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들과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역사를 이끌어주신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제 곁에는 아직 생명의 소식을 알려줄 가족과 지인들이 많습니다. 꾸준히 말씀을 공부하고 있지만 저보다 훨씬 일찍 복음에 앞장선 식구들에 비하면 한없이 부족합니다. 하나님께서 애타는 제 마음을 알아주시리라 믿고 항상 기도하며 도우심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든든한 복음의 파트너들과 함께 부지런히 말씀을 살피고 전하며 하나님 자녀답게 살아가는 제가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시누이의 사연 ‘진심이 통할 때까지’는 이번 호 달란트 이야기 코너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