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는 해마다 1300만 명 이상의 국내외 관광객이 찾는 글로벌 관광 명소지만, 항공편이 많지 않고 비용도 높아 왕래가 어려웠던 수십 년 전에는 사정이 전혀 달랐습니다. 땅에는 현무암이 지천이라 농사가 어렵고, 마땅한 산업 기반도 없어 가난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도민들에게 바다는 풍요로운 어머니의 품과 같았습니다. 전복이며 소라, 성게 같은 해산물을 넉넉히 내주었으니까요. 섬에서 나고 자란 수많은 여성들이 구구단을 떼기도 전에 물질을 배우고 바다로 나선 이유입니다.
서귀포시 WMC연수원에 마련된 ‘우리 어머니’ 글과 사진전에는 제주 해녀들의 이야기가 담긴 작품이 함께 전시되어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개관(1월 22일)을 보름여 앞둔 1월 7일에는 특별한 손님들이 방문했습니다. 일출봉으로 유명한 성산읍의 어촌계 해녀 20여 명입니다. 일평생 물질로 가족을 건사해 온 이 ‘바당’*의 ‘어멍’**들은 해녀 사진 촬영에 도움을 준 고마운 분들이기도 합니다.
전시회 관람이 대부분 처음이라는 해녀 어르신들은 아이같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작품을 감상했습니다. 이들의 발길을 붙잡은 곳은 단연 B존이었습니다. 제주 해녀들의 사진과 물질 도구, 해녀의 생애를 다룬 글과 사진이 전시된 특별 공간입니다.
작품들은 검은색 현무암을 쌓아 올린 ‘불턱’ 위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불턱이란 해녀들이 옷을 갈아입거나 물질을 하는 사이사이 불을 쬐며 추위를 쫓고 휴식을 취하는, 돌담을 쌓아 만든 안식처입니다. 해녀들은 자신과 언니 동생들의 얼굴을 사진 작품에서 찾아보며 까르르 웃고, 고무 잠수복이 나오기 전에 입었던 물적삼과 물소중이(주로 무명·광목으로 만들어 물질할 때 입던 전통 상·하의), 해산물을 채취할 때 쓰는 호멩이·까꾸리(해산물을 채취할 때 쓰는 갈고리 모양의 연장) 같은 도구들을 반갑게 바라보았습니다. 자식들 먹이고 입히려 오랜 세월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헌신한 여느 어머니들의 사연도 살펴본 뒤 관람을 마쳤습니다.
짧게는 30~40년, 길게는 70년 이상 바다에서 아이들 학비며 가족의 생활비를 캐고 따온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어릴 적에 물질 배울 때는 물속에 제대로 들어가지도 못했어요. 어머니는 미역을 한 번에 베차(잘라) 오는데, 나는 숨도 짧고 힘도 없으니까 발을 바글락바글락해 봤자(동동거려 봤자) 바닥까지 내려가기가 어려워서 네 번 만에 베차 오는 거라. 그렇게 배웠어요.”
“나도 국민(초등)학교 때 시작했는데 악착같이 캐려고 하다가 큰일 날 뻔한 적이 있었수다. 어른들이 다 올라오고 나서도 나는 안 올라온 거예요, 욕심 때문에. 한참 만에 나오니까 머리가 핑핑 돌아서 쓰러지고 말았지.”
고무줄놀이, 숨바꼭질로 해 넘어가는 줄 모르고 놀 시기의 소녀들이 어떻게 위험을 무릅쓰고 거친 바다를 누비는 해녀가 되었을까요.
“지금은 밀감도 하고 당근도 나지만 그때는 농사를 지어도 돈이 안 됐거든요. 빼떼기(썰어서 말린 고구마)도 귀했어요. 먹고살기 어려우니까 당연히 바다에 나가야지. 해산물을 캐오기만 한 게 아니에요. 소라를 따면 집에서 삶아서 성산포까지 짊어지고 가서 팔았어요. 차가 있나, 오토바이가 있나. 새벽에 무서운 줄도 모르고 한 시간을 걸었어요.”
“학교에 월사금(수업료)을 내야 하는데 집이 워낙 가난해서 밀리기도 했어요. 바다에서 뭐라도 따와서 팔아야 먹고살 수 있다는 걸 어려서부터 안 거예요.”
그렇게 시작한 물질을 반세기 가까이, 혹은 반세기 넘게 할 줄은 스스로도 몰랐습니다. 파도가 높을 때만 바다에 나가지 않았는데 그런 날에는 밭에 나가 농사를 지었습니다. 이들은 평생 해녀이자 농부였으며 누군가의 어머니였습니다.
“아들이 의대에 붙었거든요. 학비가 비싸서 더 열심히 일했어요. 겨울에는 너무 춥고 힘들어서 몸이 마비될 것 같고 이러다 죽겠다 싶다가도 들어가서 뭐라도 잡으면 너무 행복해. 그걸로 살림을 살고 학비를 내니까. 물질 아니었으면 이렇게 살지 못했을 거예요. 그래서 나는 해녀 한 걸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어요. 고생했어도 자랑스러워.”
“지금은 관절이 아파서 집 밖에 나가기가 쉽지 않아도 일단 몸만 가져가면 물에 들어가요. 들어가면 빈손으로 안 나오잖아요. 자식들한테 손 안 벌리고, 손주들이 ‘할머니’ 하면 용돈도 주고요.”
살아온 이야기를 두런두런 들려주는 해녀들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묻어났습니다. 자신들의 삶과 노고를 전시회에 담아준 이들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인사도 잊지 않았습니다.
“예전에는 해녀를 천하게 봤어요. 근데 이렇게 위해주니까 얼마나 좋아요, 힘도 나고. 옛날에는 이런 거 생각도 못 했어.”
“내가 두 살 때 부모님이 돌아가셨어요. 부모 사랑을 모르고 살았거든요. 근데 오늘 와서 보니까 우리 부모님도 나를 이렇게 사랑했겠구나. 나만 부모님을 그리워한 게 아니구나 싶어서 눈물이 계속 나네요.”
“나는 원래 복이 없는 사람이에요. 서른아홉에 남편이 돌아가셨어. 배운 건 물질밖에 없지, 매일 바다에 나가서 어둑할 때 들어왔어요. 아기는 친정 엄마한테 맡겨놓고. 그렇게 고생해서 아이들 다 키우고 집도 짓고 밭도 사고 했지. 여기 와서 보니까 옛날 생각이 나서 너무 눈물이 나. 자식들도 이제 물질 그만하라고 해서 좀 생각 중이었는데 오늘 속에 있는 말을 해서 마음이 시원해요. 사흘인가 바닷가에 와서 우리 사진 찍어준 저기 사진 작가도 너무 반갑고.”
해녀가 잠수했다 수면에 떠오를 때 뱉어내는 휘파람 같은 숨소리를 ‘숨비소리’라고 합니다. 수십 년 세월 아슬아슬 생과 사의 경계에서 숨비소리를 토해내며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고생을 마다하지 않은 해녀들. 가족의 영웅이요 제주의 자랑인 이들이 언제까지나 건강하고 행복하길 소망합니다.